PD협회보 2004.3.24
탄핵정국
또 다시 실종된 정책 선거
의회가 대통령 탄핵을 의결한 사건이 우리사회에 미치고 있는 영향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예를 들어 탄핵을 의회 다수 세력이 임기 만료 1달을 앞두고
2002년의 대통령 선거결과를 뒤집으려 한 "민주주의의의 위기"로 보는 견해와
국회가 헌법적 권한을 다수결의 원리에 따라 행사한 것일 뿐이라는 의미에서
"민주주의의 승리"를 주장하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후자의 경우는 대통령
권한이 직접적인 물리적 폭력과는 다른 법적 절차에 의해 중지될 수 있는
선례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역으로 민주주의의 발전에 기여했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탄핵을 주도한 다수당의 자기 정당화와는 무관하게 민주주의의 승리를
이야기할 수도 있는 것이다. 정치적 측면에서 보면 긍정적 영향과 부정적
영향이 극히 상반되어 좀 시간이 지나 보아야 그리고 우리 국민의 의사가
실제로 드러나 보아야 좀 더 명확해 질 일이다.
경제적인 측면에서는 탄핵이후 10여 일을 넘기면서 탄핵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어느 정도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후 정국의 전개나 총선
결과가 미칠 영향은 제외하고서 하는 말이다. 금융시장에서 그리고 기업의
경영활동에서 탄핵의 직접적이고 단기적인 영향은 거의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패닉 현상도 없지 않았던 것 같지만 대체로
마무리될 것으로 보이고, 중요 선거를 앞두고 언제나 그렇듯이 이제 모두들
선거결과에 따른 투자 전략 마련에 열심인 모양세이다.
그러나 잘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도 명확하게 탄핵 정국이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부분이 있다. 바로 정책 선거가 실종된 것이다. 이번 총선은 정당
투표제가 도입되기 때문에, 과거의 어느 선거보다도 정당별 정책 차이와
평가에 많은 관심이 모여져 있었다. 감성에 의한 편가르기의 정치사에서
벗어나, 정책개발 경쟁과 정책 내용으로 유권자의 평가를 받는 정치의 모습을
이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기 때문이다. 이번 총선 만큼은 정당이나
정치인 행세를 하려면 당연히 고유한 정책이념과 정책내용을 일관되게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인식을 확산시키고, 선거 때만이 아니라 일상적으로 정책을
개발하는 풍토를 만들어 가는 출발이 되게 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한
시민단체의 노력도 적지 않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주요 시민 단체마다 혹은
연합해서 정당들의 정책을 검증하고 평가하는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으로
안다. 언론에서도 정책 비교와 관련된 기획이 다수 만들어 졌었다.
탄핵이 정책 선거의 싹과 가능성을 일거에 날려 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시민단체나 언론이나 급격히 탄핵 찬반 문제로 관심이 돌아가면서 정책평가와
관련된 여러 가지 기획들도 폐기되고 있다. 정당 투표제로 마련된 아까운
기회를 또 다시 놓치게 된 것이다.
우리정치 지형의 향후 모습에 대해 여러 가지 가능성을 짐작해 보는
의견들이 무성하다. 그 가운데 틈틈이 극단적으로 노동우위의 포퓰리즘에 대한
우려와 자본우위의 파시즘에 대한 우려가 모두 발견된다. 놀랍게도 두 상반된
견해가 근거로 삼고 있는 사회경제적 현상은 똑 같다. 공식적으로도 500만명에
육박하고 비공식적으로는 750만명까지 추산되는 비정규직 노동자, 370만명을
넘어선 신용불량자, 한국개발연구원(KDI)이 밝힌 대로 2백 69만여 가구에
달하는 무직자 가구, 그 외 통계에도 잘 잡히지 않는 몰락하는 자영업자들이
그 근거이다. 그리고 정상적인 생계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형성될 수밖에 없고
누적되어 가는 사회적 적대감이 또한 근거가 된다. 신용불량자의 명칭을 신용
등급이 낮은 자로 바꾸어 준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탄핵은 기존
정당들이 이 어려운 정책 과제를 회피하고서도 선거를 치룰 수 있게 해
주었다. 이것이 이번 탄핵 사태의 가장 부정적인 효과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